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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가야는 살아있다. 고대국가 대가야의 삶이 흐르는 역사의 현장


대가야의 멸망

대가야가 562년 신라에 병합됨으로써 가야는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고 말았다.
지산리고분군의 발굴조사 결과를 보면 대가야가 멸망하는 시기인 서기 500년대 후반경이 되면 무덤과 토기의 모양이 신라식으로 변화되며, 더 이상 대가야식의 무덤과 토기가 만들어지지 않는다. 또 대가야를 정복한 신라는 대가야의 지배층을 다른 지역으로 뿔뿔이 흩어져 옮겨 살게 했다.

때문에 가야금을 만든 우륵은 신라의 중원경(中原京, 청주)으로 보내졌고, 신라의 대문장가인 강수(强首)와 명필 김생(金生)도 대가야의 후손들이지만 고령이 아닌 다른 곳에서 활동던 것이다.

따라서 가야 멸망 후 김유신(金庾信) 등 금관가야 출신들은 무(武)로서 신라의 통일에 도움을 주었다면, 대가야 출신의 인물들은 문(文)으로써 신라의 발전에 기여하였다고 할 수 있다. 또 한편으로 대가야의 후예들은 해인사 창건에 크게 이바지한 순응(順應)과 이정(利貞)처럼 불교에 귀의하여 조용히 망국의 한을 이어 갔을 것이다.

토기 및 무덤의 변화

시조인 이진아시왕(伊珍阿豉王)에서 도설지왕(道設智王)에 이르기까지 16대 520년간 지속되었던 ‘대왕’의 나라 대가야는 500년대 국제정세 변화의 소용돌이에 휘말리면서 신라에 병합되고 말았다. 하지만 멸망 이후 대가야의 모습에 대한 기록은 남아 있지 않다. 다만, 지산리고분군의 발굴조사 결과 커다란 변화가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즉, 500년대 후반경이 되면 대가야 사람들이 주로 만들었던 구덩식돌널무덤은 신라 양식의 굴식돌방무덤으로 바뀌고, 무덤 속의 토기도 모두 신라 양식으로 변화된다. 이는 대가야 멸망 이후 대가야의 문화가 신라 문화로 급속히 바뀌어 갔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담당자
대가야박물관 054)950-71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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