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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가야는 살아있다. 고대국가 대가야의 삶이 흐르는 역사의 현장


조선 및 근대

조선이 건국된 이후 1413년에 고령에는 현이 설치되어 중앙에서 현감이 내려와 다스리게 되었다. 그즈음 고령에 살고 있던 토박이 성씨인 박(朴)ㆍ신(申)ㆍ유(兪)씨들이 이름난 가문으로 성장하여 서울로 가서 정치에 참여하기도 했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고령에 살고 있던 김면(金沔)은 의병을 모집하여 왜적을 크게 무찔렀으며 의병도대장(義兵都大將)이 되어 활약하다가 전장에서 순국하였다. 또 정유재란 때에도 고령의 의병장 박정완(朴廷琬)이 고령전투에서 대승을 거두었다. 1895년에는 고령군이 대구부(大邱府)에 속했으나, 이듬해 다시 경상북도 고령군이 되었다.

조선시대의 유적과 유물

성리학을 통해 나라를 다스리고자 한 조선시대가 되면 이전의 불교문화가 유교문화로 바뀌게 된다. 따라서 조선 초기인 태종 때에는 고령에도 향교가 세워져 성리학을 가르치며 공자께 제사하였다. 그 후 고령 곳곳에는 여러 서원들이 건립되어 많은 학생들이 성리학을 공부하고 과거시험을 보았다. 한편 고령에는 많은 제자들을 훌륭한 정치가로 키워낸 점필재 김종직선생의 종가와 정치가이자 대학자였던 죽유 오운선생의 종가, 임진왜란 때 영남지역 3대 의병장의 한사람인 송암 김면선생의 묘소와 유적이 있다. 또한 이와 관련된 중요한 책과 문서들이 전해오고 있다. 더불어 고령에는 효자와 열녀가 많았고 역대 고령 현감들의 비석도 많이 남아 있다. 특히 조선후기에는 봇짐과 등짐장수들의 상인조직인 고령 상무사가 크게 번성하여 영남 내륙지방 상권을 좌우하였다.

고령지역의 도요지 - 1454년, “고령 도자기 품질 으뜸”(세종실록지리지)

도자기를 생산하기 위해서는 질 좋은 점토와 풍부한 땔감, 그리고 이들을 쉽게 운반할 수 있는 조건이 갖추어져야 한다. 고령지역은 이러한 요건들이 잘 갖추어져 있어 대가야시대 이래 끊임없이 좋은 토기와 자기를 만들어 왔다. 대가야 도공들의 장인정신과 빼어난 제작기술이 전해져, 고려ㆍ 조선시대에는 전국에서 가장 질 좋은 도자기를 생산하는 곳으로 널리 알려져 궁궐에까지 납품되었다. 고령지역에는 현재 운수면, 성산면, 쌍림면, 대가야읍, 우곡면 등 5곳에 대규모 가마터가 남아 있고, 지금까지 확인된 가마터가 1백여 곳이 넘는다.
이 밤톨같이 생긴 것은 무엇일까?
비짐받침 조선초기 분청사기를 굽던 가마터에서 나온 점토로 만든 비짐받침이다.
가마 속에 도자기를 구울 때 그릇이 붙지 않게 하기 위해 그릇 바닥을 받쳐 주는 용도로 사용되었다. 지금으로부터 500여 년 전 도자기를 만들던 장인들의 지문이 선명하게 찍혀 있다.

사부동ㆍ기산동도요지

사부동ㆍ기산동도요지 고령지역의 도요지 중 가장 유명한 곳이 성산면의 사부동과 기산동 도요지이다.
이 두 곳은 불과 1km 정도 떨어진 거리에 있으며, 고려 말에 시작하여 조선 전기까지 청자(靑磁)와 분청사기(粉靑沙器)를 굽던 가마터이다.
이 곳에는 지금도 부서진 가마의 파편들과 함께 대접, 접시, 종지, 병 등 각종 자기 조각과 구울 때 그릇을 올려놓았던 받침들이 여기저기 흩어져 있다. 이처럼 대가야시대로부터 면면히 이어져 온 고령의 도자기 기술은 임진왜란을 거치면서 일본으로 전해져 큰 영향을 미쳤다.

고령지역 도요지 출토 유물

가마 속에서 도자기를 굽기 위해서는 여러 가지 용구들이 사용된다. 먼저 가마의 바닥에 모래를 깔고 도침(도지미)을 놓고 그 위에 완성된 그릇을 여러 개 겹쳐 올려놓는다. 이때 그릇이 서로 붙지 않게 하기 위해 밤톨만한 크기의 받침으로 그릇 바닥을 받쳐 준다. 또 불을 땔 때 불길이 직접 닿거나 그릇에 불티나 이물질 떨어지는 것을 막기 위해 갑발을 아래위로 덮어주기도 한다.

호구단자

호구단자란 현재의 호적과 비슷한 조선시대의 호적대장을 만들기 위한 기초 자료이다. 호구단자에는 호주의 주소, 본인과 부인의 4조, 함께 거주하는 사람, 노비 등의 내용이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 백성들이 호구단자를 작성하여 신고하면 각 고을에서는 사실 여부를 확인한 후 호적대장에 기록한다. 이렇게 만들어진 호적대장은 군역차출이나 신분 확인, 소송 자료로 활용되었다. 죽유종택

죽유종택 소장유물

죽유 오운(1540~1617)은 조선중기의 학자ㆍ문신이자 의병장이었다. 고령 쌍림면 송림리에 위치한 선생의 종택에는 ≪대학장구대전≫ㆍ≪양세유묵≫ 등 고전적과 교지ㆍ호구단자ㆍ분재기 등 고문서를 비롯하여 문집책판과 상아홀 등 많은 유물이 전해오고 있다. 이곳에 전시된 유물은 죽유종택에서 소장하고 있는 교지, 상아홀, 말안장 등이다.

고령향교 소장유물

향교는 조선시대 지방사회에 성리학의 교육과 공자를 비롯한 성현을 향사하기 위해 설립된 국립교육기관이다. 고령향교는 조선 초인 1414년(태종 13)에 건립되었다가 몇 차례 이전한 후 1702년(숙종 28) 현재의 위치에 자리잡았다. 이곳에 전시된 유물은 고령향교에서 소장하고 있는 각종 고문서와 목판 등이다.

고령의 옛기와

기와편 2005년 대가야읍내 옛 고령현 관아의 객사 터 발굴조사에서 출토된 기와들에는 특히 꽃무늬를 새긴 기와가 많고, 또 ‘고령(高靈)’이란 글씨를 새긴 기와들이 많다. 아마도 고령사람들은 꽃을 무척 좋아했고, 대가야의 도읍지 고령에 살고 있음을 자부했던 흔적이라 여겨진다.

조선시대 고령의 향교와 서원

고령향교, 문연서원지, 영연서원지, 매림서원, 도암서원 및 김면장군유적지, 노강서원, 벽송정, 만남재, 죽유종택, 점필재종택, 도연재, 성풍세효자비

고령향교, 도연재, 점필재종택, 성풍세효자비
담당자
대가야박물관 054)950-71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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